사랑하는 소년이 얼음 밑에 살아서, 한정원
2025. 3. 4. 20:58
- 스크린은 '만물전당포'라고 적힌, 간판으로 변 한다. 카운터 구실을 하는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다. - 주인장 노파가 그 옆에 서서, 검은 가지뿐인 화 분에 물을 준다. |
노파 보자. 지금이 몇 월이지? 발이 차가워지는 걸 보니, 옳지, 십일월쯤이겠구나. 보관품 상자 어디에 양말도 있을 텐데…… 아냐, 아냐. 그 귀한 걸 신을 수는 없지. 소수족의 소멸 언어로 짠 양말이거든. 울퉁불퉁하긴 해도 색이 참말로 고왔지. 그걸 담보로 맡긴 손님은 뭘 빌려 갔더라? 말을 못하는 배내옷이었나? 과묵한 거울이었나? 오랜 일이야. 먼 일이야. 다 기억하려면 무릎이 아픈 일이야. 이 무릎은 말이야. 가짜다. 사람들은 진짜만 좋아하지만, 늙으면 알게 돼. 진짜가 죽으면 가짜라도 짚어야 살아. |
- 물뿌리개를 내려두고 절뚝이며 의자로 걸어가 앉는 노파. |
노파 세상에. 눈물을 맡긴 이도 있었어. 대야 안에 부부의 눈물을 모아 온 거야. 어린 자식이 죽었거든. 몰래 울려고 세수를 하루에 열 번 스무 번 했다지. 얼굴이 온통 물러 있었네. 그자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갔어. 아무리 고민해도 필요한 게 없었거든. '아침이 절대 오지 않는 밤'이 있었다면 그걸 가져갔을지도 모르지만. |
- 시계탑 종소리가 세 번 울린다. - 소년의 목소리. - 파도가 모래를 훑는 소리가 한 차례 지나간다. |
들어봐. 사람의 끝은 해파리야. 하지만 끝은 끝에만 있지 않아서, 어떤 아이는 이르게 해파리가 돼. 서서히 투명해질 거야. 투명해서 사라졌다고 느껴질 거야. 늘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어. 사탕도 마음껏 먹고, 나쁜 어른들 골탕도 먹이고, 신나잖아. 투명한 미래라고 하자. 네가 나를 지나칠 수도 있고, 내가 너를 통과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없는 건 아냐. |
- 무대 밝아진다. - 큰 괄호 모양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등진 채 앉 아있는 소녀와 소년 - 울음을 터뜨리는 소녀. |
소년 내 목소리 들려? 소녀 (……) 소년 왜 괄호 속으로 들어간 거야? 소녀 말할 수 없이 슬퍼서. 소년 (……) 소녀 꿈속에서 네가 슬픈 말을 했어. 소년 너에게? 소녀 해파리가 될 거라고. 소년 그랬어? 소녀 투명해질 거라고. 소년 그저 꿈일 거야. 소녀 그저 꿈이었으면. 소년 조심해. 울다가 웃으면 어른이 된다. 소년 계속 웃어 계속 간지러워해. 계속 뿔을 길러. 어디서든 널 알아보게. |
- 무대 밝아진다. - 소녀를 업은 소년, 제자리에서 걷고 있다. 소녀 의 맨발이 허공에서 달랑댄다. |
소녀 멀구나. 소년 그리운 만큼 멀구나. 소녀 깊겠지. 소년 그리운 만큼 깊겠지. 소녀 바다는 수심(水深)이 있으니까. 소년 수심(愁心)이 있으니까. 소녀 그래서 물결이 지나 봐. 소년 그래서 주름이 지나 봐. |
- 깜깜한 무대. - 기차 문이 닫히는 소리. - 바퀴 굴러가는 소리. - 소녀의 목소리. -바람의 목소리. - 곰의 목소리. - 새 찾는 남자의 목소리. - 귀신의 목소리. - 전당포 노파의 목소리. - 기관사의 목소리. - 소녀의 목소리. - 기차가 굴속으로 들어가는 소음에 소녀의 목 소리가 묻힌다. - 더욱 커지는 바퀴 소리. - 한동안 기차 달리는 소리가 계속 된다. - 열차가 끽, 서는 소리. -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
괘종시계가 울면 세어보게 된다. 몇 번 울어야 밤이 멈추나. 밤은 자꾸 나를 깨워 나쁜 꿈이 찾아오니 외롭다고 한다. 이를 가는 건 마음을 독하게 먹자는 거였고 잔기침을 하는 건 마음을 풀썩 구부리고 만 거였다고. 나쁜 꿈은 나쁜 사람이나 나쁜 짓과는 다르지. 내일은 모두 잊을 거야, 하지만 오늘만 계속 이어지는구나. 밤은 구멍이 많은 스웨터. 실오라기 하나를 당기면 끝없이 풀려, 밤이 짧아지고 아침이 온다. 아침은 헐벗어서 부끄럽다. 부끄러움으로 다시 실을 잇는 거지. 부끄러움을 견디고. 부끄러움의 무늬를 넣어서.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꿈은 뭐였어요? 가장 아름다운 꿈은, 가장 아름다운 꿈은, 그 애와 함께 있는 꿈이에요. |
- 조명이 들어오고, 무대로 들어서는 소녀. - 스크린에서는 언 바다를 찍은 영상이 나오고 있다. - 소녀가 바다를 바라본다(정면을 바라본다). - 스크린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소녀. 바닥에 뺨을 대고 옆으로 눕는다. - 바람 소리가 거세다. |
소년의 목소리 새다! 소녀 새다! 소년의 목소리 심장이다! 소녀 심장이다! 소년의 목소리 저기 얼음 위에서 반짝이는 게 뭐지? 소녀 네 이름이라고 하자. 무수한 너라고 하자. 소년의 목소리 언 바다에서도 바다 냄새가 나네. 소녀 투명한 냄새. |
- 소녀의 목소리. |
꿈을 꾸던 그대로 걷고 있어 창들이 검은 눈을 켜고 말을 붙여 소녀야, 또 맨발이구나 네게 갈 때마다 잠옷 차림인 걸 용서해 이런 어른스러운 말투를 배우게 됐어 살이 트고 있거든 더 차가운 사람이 될 거야 눈이나 서리가 된다면 더 좋을 거야 네게 업힐 수 있겠지 업히고도 무겁지 않을 만큼만 자랄 수 있겠지 예쁘게도 얼었다 내 발은 닿자마자 얼음 위에 붙어버려 얼음 밑에 사랑하는 소년이 살아서 그런 거지 심장의 절반을 얼음에 대고 오래 비스듬해 내가 수심을 재는 방법이야 하지만 결말을 알고 있지? 몸이 허공으로 번쩍 들려, 발이 없다는 듯이, 왔던 밤을 지나, 이불 속에 넣어지는걸 아침엔 아무 기억 나지 않는다고 말할 참이야 그러고는 내일 밤에 또 사랑하는 죽은 소년, 너를 만나러 올게 |
* 일곱 번째 스포트라이트 *
빈 무대의 양쪽에서 각각 소녀와 소년이 나와 중앙에 나란히 선다.
정면을 응시하며 웃는다.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꺼진다.
다시 조명이 켜지면 이제 소녀 혼자 서서 웃고 있다.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꺼진다.
다시 조명이 켜지면 이제 소년 혼자 서서 웃고 있다.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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