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왕자, 은희경
2020. 11. 14. 16:45
나 혼자 생각했었다. 얼어붙은 땅 깊이에서 뒤척이는 눈먼 씨앗일 뿐이지만, 언젠가 당신이 내게서 꽃피울 봄날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건 영원한 겨울과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괜스레 긴 머리를 잘라버리고 입지 않을 운동복을 사고 지독한 몸살을 앓고 오전이 다 가기도 전에 세끼를 먹어치우고 한밤에 불쑥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한시간씩 골목을 쏘다니고, 그러고도 다음 날이면 약속된 시간에 배달된 우유처럼 내 마음이 당신의 문 앞에서 다소곳이 아침을 기다리고 있던 날들이, 대체 몇번이었는지. 나는 그 마음을 당신이 조금이나마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알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라고 하는 함박눈이 미친 듯이 내려서 귀퉁이에 홀로 쌓여 있다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봄이 되어서야 당신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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