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강, 류시화
2021. 1. 16. 19:09
그 여름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지
물속에 잠긴 발이 신비롭다고 느꼈지
검은 돌들 틈에서 흰 발가락이 움직이며
은어처럼 헤엄치는 듯했지
너에 대한 다른 것을은 잊어도
그것은 잊을 수 없지
이후에도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 첫사랑의 강
물푸레나무 옆에서
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많은 여름들이 지나고 나 혼자
그 강에 갔었지
그리고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그 자리에 앉아 보았지
환영처럼 물속에 너의 두 발이 나타났지
물에 비친 물푸레나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 희고 작은 발이
나도 모르게 그 발을 만지려고
물속에 손을 넣었지
우리를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알았지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한때 있던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떠나온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POE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에게, 나선미 (0) | 2021.01.16 |
---|---|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장강명 (0) | 2021.01.16 |
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0) | 2021.01.16 |
흰, 한강 (0) | 2021.01.16 |
불한당의 모험 10, 곽은영 (0) | 2021.01.16 |